향기로 기억되는 봄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해서 참 좋겠어”
이런 말 들어 본 적 있으신지. 나는 한동안 ‘편리한 기억력’을 가진 사람으로 오해를 받았었다. 무슨 큰 죄를 지어 경찰서나 청문회에 끌려나가 일방적으로 추궁당한 것은 아니고, 여자친구가 불시에 던진 질문 - 그 때 기억나지? - 에 순발력있게 대응을 못해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순간적으로 정적에 휩싸이는 상황이 종종 발생했던 것이다.
발연기만큼이나 심각한 문제는 바로 기억력. 삶의 의욕이 없이 매사를 심드렁하게 대하는 것도 아닌데, 도대체 나는 왜? 그녀가 두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하는 ‘그 때’가 기억나지 않는걸까. 미안하고 답답했다.
태어날 때부터 기억장치의 저장용량이 적었던 것일까 아니면 어딘가 심각하게 훼손된 배드섹터가 있어서 정보가 입력되자마자 조각조각 흩어져 버리는 걸까. 지금껏 별로 나아지지 않은 것을 보면 둘 다일지도 모르겠다.
반면 그녀는 기억력에 있어서 일종의 ‘사진가’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의 장소와 구체적인 테이블의 배치는 물론, 내가 입고 있던 니트의 컬러와 텍스타일, 그날따라 유난히 푸르렀다는 하늘의 채도까지. 언제든 사진첩에서 컬러 사진을 꺼내어 보는 것처럼 술술 이야기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은 너댓 살 즈음인 것 같다. 연탄화로 앞에 쭈그려 앉아 대합을 굽고 있는 어머니, 큰아버지의 병문안을 마치고 포장마차에서 술잔을 드는 아버지… 짧게 반복되는 흑백의 무성영화처럼 부모님의 얼굴은 흐릿하기만한데, 그 때의 냄새 - 연탄가스와 꼼장어와 소주 - 만큼은 이상하게도 또렷하다. 내 머릿속에 가장 오래된 기억은 냄새의 조합인 셈이다.
내가 봄을 기억하는 방법도 비슷한 것 같다. 온갖 빛깔의 꽃들이 눈앞에 가득히 펼쳐져 있어도 봄은 오지 않은 것이나 다름 없다. 새큼하면서 톡 - 쏘는 매화향을 맡기 전까지, 청량한 길마가지꽃향기가 언덕을 넘기 전까지, 봄은 아직, 아직이다.
봄은 빛으로 시작되지만 결국 향기로 기억된다.